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E. 리 (문단 편집) === 군사적 평가 === 아군보다 더 많은 수의 북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를 거두어 남북전쟁 최고의 전술가 중 하나로 꼽힌다. [[스톤월 잭슨]], [[제임스 롱스트리트]], [[젭 스튜어트]] 등 유능한 장교단을 기용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휘하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키는 데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공병장교 경력을 살려 [[피터스버그 포위전]] 등에서는 야전 축성으로 공격하는 북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도 부정적인 재평가를 받는 경우도 많다. 전술적으로는 기술의 발달로 인해 유리한 위치에서 방어하는 상대를 공격하기 어려워진 당시 전장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공세 일변도로 나서 남부연합이 감당하기 어려운 큰 인명피해를 자주 입었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7일 전투나 [[챈슬러스빌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었고, [[앤티텀 전투]]는 전투 전 강을 건너 후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전력으로 전투를 고집하여 치명타를 입을 뻔 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의 피켓의 돌격을 명령하고 실패한 것은 가장 대표적인 리의 공세 실패 사례이지만, 이는 게티즈버그뿐만 아니라 리가 전쟁 내내 보여준 문제점이었다. 전략적으로도, 남부연합 수도 리치먼드에서 가장 가까운 야전군의 사령관으로서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조언자였지만 지나치게 버지니아 중심으로 전쟁을 바라보았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서부전선에서 주요 거점들이 하나하나 북군의 손에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지원군을 차출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이 지원군을 받아야 한다고 고집했다. 서부전선에 지원될 수 있었던 병력과 물자를 대신 받아 북진에 나서 북군에 대승을 거두고 협상을 이끌어내고자 했지만, 당시 전쟁 환경에서 북군 주력을 대파시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결국 리의 두 차례의 북진은 모두 실패했다. 반면 북군의 그랜트는 서부전선에 있을 때도 지원군을 달라고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휘하에서 다른 지역으로 지원군을 차출하는 데 열려 있었으며, 총사령관에 오른 뒤에는 전쟁 전체를 아우르는 대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여 리와 남부연합을 항복시키는 데 성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